지난 글에서 우리는 부신피로가 결국 "스트레스를 못 견디는 호르몬 회로의 문제"라는 관점에 이르렀습니다. 부신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뇌와 부신 사이의 대화 전체가 흐트러진 상태. 그리고 그 대화의 흐트러짐은 여러 단계를 거쳐 서서히 진행된다는 점을 짚어두었죠.
이어지는 2부는 그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스트레스가 시작된 순간부터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까지, 호르몬 회로는 어떤 궤적을 그리며 움직일까요? 그리고 나의 부신피로는 지금 그 궤적 위 어디쯤 와 있는 걸까요.
이번 글은 5부작 시리즈 중 '시간의 축'에서 부신피로를 조명하는 편입니다. 같은 증상이라도 스트레스에 노출된 시간의 길이에 따라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도 한 장을 펼쳐놓고, 현재 위치를 가늠해본다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신피로, 경고 아닌 ‘지도’
단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만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래 제시하는 3단계 개념은 '어디까지 나빠졌는지'를 진단하는 척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좌표에 가깝습니다.
같은 '피곤하다'는 말이라도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이제 막 경보가 울린 참이고, 어떤 분은 이미 수년째 비상 모드로 살아오셨으며, 또 어떤 분은 그 비상 모드조차 유지할 힘이 바닥난 상태입니다. 회복의 속도도, 필요한 전략도 이 위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모델이 처음 제안된 건 사실 거의 90년 전의 일입니다.
1936년, 한스 셀리에(Hans Selye)의 발견
1936년, 헝가리 출신의 젊은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Hans Selye)는 흥미로운 관찰을 합니다. 쥐에게 서로 다른 자극(차가운 환경, 독성 물질, 과도한 운동 등)을 가하는 실험을 실시했죠. 그런데 자극의 정체와 무관하게 쥐들은 모두 똑같은 3단계 반응을 보였습니다.
경보 → 저항 → 탈진
어떤 자극이든, 몸은 대체로 같은 형태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셀리에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입니다. 일반적응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 GAS). 오늘날 우리가 일상어로 쓰는 '스트레스(stress)'라는 단어도 그가 이때 만든 단어라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물론 셀리에의 원형 모델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순합니다. 쥐 실험에서 출발했고, 사람의 심리적 요인이나 유전적 차이는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델에 최근 연구자들이 여러 정교함을 더해왔습니다.
2024년 StatPearls의 생리학 리뷰는 이 3단계를 HPA축과 자율신경계의 연속적 활성 패턴으로 재해석하고 있고, 1편에서 언급한 Bruce McEwen의 생체적응부하(Allostatic Load) 개념은 저항과 탈진 단계를 '반복된 스트레스 사이클의 누적된 마모'로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셀리에의 통찰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1. 스트레스는 시간의 함수라는 것.
2. 같은 스트레스라도 기간에 따라 몸 안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이 변하지 않을 관점 위에서, 부신 호르몬이 움직이는 3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단계 : 경보(Alarm)
몸이 깨어나는 순간

새로운 스트레스가 등장하면 몸은 곧바로 반응합니다. 시상하부에서 CRH(코르티코트로핀 방출 호르몬)가 분비되고, 이어 뇌하수체가 ACTH(부신피질 자극 호르몬)를 내보냅니다. 그 신호를 받은 부신이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을 뿜어내죠.
심박이 빨라집니다. 혈당도 오릅니다. 감각이 날카로워집니다. 발표 직전의 긴장, 마감을 앞둔 밤샘, 낯선 환경에서의 각성들까지. 모두 경보 단계의 전형적인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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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주 오해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코르티솔이 치솟았다"는 말을 들으면 으레 몸에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기기 쉬운데, 경보 단계의 이 반응은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몸이 스트레서에 맞춰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 자체가 생존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인 것이죠.
문제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응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가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 단계는 주관적으로 오히려 좋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집중력이 올라가고 피로감이 사라집니다. 오전 내내 또렷하고, 일이 손에 잘 잡히며, 어떤 분들은 "나 요즘 컨디션 좋아요"라고까지 말합니다. 에너지가 동원되는 단계이지 고갈되는 단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은 동시에 조용한 신호도 함께 보냅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신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심박이 평소보다 빨라진 느낌, 약한 긴장성 두통
- 잠이 깊지 않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음
- 식욕의 일시적 변화 (더 잘 먹거나, 입맛을 잃거나)
- 에너지 넘침과 피로감이 교차함
경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지속 시간입니다. 스트레스가 며칠에서 수 주 안에 해소되면 몸은 자연스럽게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옵니다. 이 단계에서는 별다른 치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회복 시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잘 자고, 잘 먹고, 며칠 쉬면 대부분 스스로 정리됩니다.
문제는, 현대인의 스트레스가 며칠 안에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떠날 줄 모르고 우리 삶에 너무 근접해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습니다.
2단계 : 저항(Resistance)
버티는 동안 조용히 쌓이는 것

업무가 한 주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 간 갈등은 몇 달씩 이어집니다. 양육과 간병은 최소 몇 년 단위죠. 이렇게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몸은 경보를 계속 울리는 대신, '지속 가동 모드'로 전환합니다. 바로 이 단계를 ‘저항 단계’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이 단계의 사람은 "잘 버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실상 밤엔 깊이 못 자도 아침엔 일어나고, 회의도 해내고, 집안일도 돌봅니다. 큰 병으로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몸 안에서는 이미 조용한 마모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수용체(GR)의 감수성 저하입니다. 1편에서 짚었던 2020년 Molecular Systems Biology 연구가 이 과정을 수학적 모델로 보여주었죠. 코르티솔은 여전히 분비되는데, 세포가 그 신호를 예전만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은 더 많은 코르티솔을 분비해 이를 보상하려 하고, 혈중 코르티솔 농도는 높은 상태로 평탄하게 유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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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변화는 DHEA의 조용한 고갈입니다. 코르티솔과 DHEA는 같은 전구체(프레그네놀론)를 나눠 쓰는데, 만성 스트레스 상황에서 몸은 생존에 급한 코르티솔 쪽으로 자원을 몰아넣습니다.
그 결과 1편에서 소개한 '노화 방지 호르몬' DHEA는 점차 줄어들고, 코르티솔/DHEA 비율이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비율의 변화는 기능의학이 저항 단계의 지표로 중요하게 보는 신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수면의 질도 떨어집니다. 잠을 자는 시간은 비슷한데 아침에 개운하지 않습니다. 코르티솔이 밤에도 충분히 떨어지지 않아 깊은 수면이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장내 미생물 환경이 미세하게 변하고, 인슐린 민감성이 떨어지며, 복부 지방이 슬며시 늘어납니다.
여기까지 이 단계에서 벌어지는 대표적인 몸의 신호입니다. 1편에서 정리한 증상 그룹 중 '에너지와 리듬의 어긋남'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점점 힘들어짐, 알람 후 한참을 더 누워 있어야 함
- 오전은 그럭저럭 버티지만 오후 2~4시의 급격한 피로
- 커피 없이 하루가 시작되지 않음, 단 음식과 짠 음식이 당김
- 사소한 일에 예민해지고, 예전 같으면 웃어 넘길 일에 감정 기복
- 잠은 자는데 회복감이 없음
저항 단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속 시간이 매우 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개월, 수년, 심지어 십수 년도 이어질 수 있는데, 실제 진료실에서 만나는 만성피로 환자의 상당수가 이 단계에 굉장히 오래 머물고(?) 계십니다. "원래 내 체력이 약한 줄 알았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래 그래 왔을 뿐입니다.
이 단계도 여전히 가역적이긴 합니다. 다만, ‘경보’였던 1단계 처럼 "며칠 쉬면 낫는" 수준은 아닙니다. 생활습관의 조정만으로는 돌이키기 어렵고, 식이·영양·수면·스트레스 관리를 체계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기능의학이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저항 단계죠.
3단계 : 탈진(Exhaustion)
역설적 반전이 일어나는 지점

저항이 오래 이어지면, 어느 시점부터 의외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높게 유지되던 코르티솔이 오히려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이 현상을 처음 체계적으로 기술한 연구는 2005년의 리뷰 논문 "A new view on hypocortisolism"입니다. 만성피로증후군, 섬유근통,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낮은 코르티솔 수치가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 연구였죠. 저자들은 이를 "장기간의 HPA축 과활성 끝에 나타나는 적응적 하향 조절"로 해석했습니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오랫동안 최대치로 돌아가던 엔진이 스스로 출력을 낮추는 상황에 가깝습니다. 더 이상 높은 코르티솔을 감당할 수 없으니, HPA축이 자기 보호를 위해 신호의 볼륨 자체를 줄이는 것.
여기서 중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이 상태가 부신이 물리적으로 '망가졌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로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반응성을 낮춘 상태일 뿐입니다. 이 구분은 1편에서 짚은 대로, 부신피로를 '부신 조직의 고장'이 아닌 '회로의 조절 이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포인트이기도 하죠.
이 단계에 들어선 몸은 이렇게 말합니다.(아래 박스) 1편의 '회복의 더딤과 전신 징후' 증상 그룹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이 ‘탈진’ 단계입니다.
- 아침 기상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짐, 커피 없이는 일상 유지 불가
- 감기에 자주 걸리고, 걸리면 회복이 유난히 더딤
- 운동 후 피로가 며칠씩 이어지는 운동 불내성
- 감정이 평탄해지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짐
- 1편에서 짚은 기립성 어지럼증, 짠 음식 갈망이 뚜렷해짐
- 브레인포그, 집중력 저하가 심화됨
탈진 단계의 회복은 시간이 걸립니다. 수개월 단위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1~2년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 회복이 가능한 상태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회로가 조절 능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단계부터는 전문적 평가와 체계적 지원 없이는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부신피도 몇 단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가운데 "내가 지금 몇 단계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만, 한 가지 덧붙여 드리고 싶은 관점이 있습니다.
이 3가지 단계는 일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셀리에의 원형 모델은 ‘경보 → 저항 → 탈진’을 한 방향의 화살표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현대 연구는 이 그림을 훨씬 더 유연한 지도로 수정해 왔습니다.
FKBP5 같은 유전적 변이를 가진 사람은 1단계에서 3단계로 더 빠르게 이동하는 반면, 회복 자원이 풍부한 사람은 3단계에서 2단계로, 심지어 2단계에서 1단계로 역행할 수 있습니다. 수면, 영양, 사회적 지지, 운동, 의미 있는 관계 등, 이런 것들이 단계 사이의 화살표 방향을 바꾸기도 하죠.
또 한 가지. 같은 사람의 몸 안에서도 삶의 국면에 따라 단계는 이동합니다. 20대에는 대체로 1단계를 오가다가, 30~40대 양육과 커리어가 겹치는 시기에 2단계에 오래 머무르고, 어떤 계기로 번아웃이 오면 3단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회복하면 2단계로 돌아오는 식입니다. 단계는 영구적 낙인이 아니라 ‘현재의 좌표’입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관점 위에서 부신피로의 정의를 다시 꺼내오면 이렇게 읽힙니다.
"부신피로는 스트레스를 못 견디는 호르몬 회로의 문제다."
다시 얘기 드리지만, 오늘 소개해 드린 3단계는 이 회로가 현재 어떤 리듬으로 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스냅샷이지, 이 회로의 본질적 고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는 3단계다"라는 결론에 낙담할 이유도, "나는 1단계다"라며 안심할 이유도 사실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위치에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입니다.
기억해야 할 점
단계를 가르는 건 특정 호르몬 수치 하나가 아닙니다. 회로 전체가 어떤 리듬으로 돌고 있는가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코르티솔 기울기, 코르티솔과 DHEA의 비율, 스트레스 자극에 대한 반응성, 회복에 걸리는 시간까지. 이 여러 지표가 함께 어우러져 현재의 단계를 그려냅니다. 한 사람의 하루 안에서도 이 리듬은 움직이고, 계절이 바뀌면 또 움직입니다.
부신 호르몬 이동 경로 = 회복 좌표
지금까지 부신 호르몬이 움직이는 3단계를 순서대로 소개해드렸습니다. 경보에서 저항으로, 저항에서 탈진으로. 그리고 다시, 회복을 통해 거꾸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지점까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저는 3단계를 낙인이 아닌 ‘좌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읽으신 분들께 드리고 싶은 메시지도 결국 같습니다. 내 몸이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치료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갈지를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사실 '시간'의 축에서만 부신피로를 바라본 것입니다. 같은 단계에 있는 두 사람이라도 몸 안의 어떤 회로가 더 무너져 있느냐에 따라 회복의 전략은 달라집니다.
부신은 혼자 움직이는 장기가 아닙니다. 장과 뇌, 대사까지. 부신은 우리 몸 안에서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회로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 동료들 가운데 누가 먼저 흔들리는지, 그리고 그 흔들림이 부신에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다음 3부에서는 '공간'의 축에서 부신피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준비 중) 3부 이어서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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