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장을 '음식을 소화하고 배출하는 기관' 정도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20여 년간 축적된 연구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장은 면역의 70%를 담당하고, 뇌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호르몬 균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몸 전체의 지휘자'에 가깝습니다.
기능의학에서도 이러한 장의 역할에 일찍이 주목해 왔습니다. 하이맵의원의 의료진 역시 오랜 시간, 7만 건 이상의 기능의학 검진을 진행하면서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만성피로, 피부 트러블, 우울감처럼 원인을 알 수 없던 증상들의 출발점이 종종 '장'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 건강이란? 39조 미생물과의 공존
우리 안의 또 다른 세계
우리 장 속에는 약 39조 개의 미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지 감이 잘 안 오실 수 있는데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수가 약 37조 개입니다. 다시 말해, 장내 미생물의 수는 '나'를 이루는 세포 수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이 미생물들은 단순히 장에 '얹혀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먹은 음식을 분해하고, 비타민을 합성하며, 면역 세포를 훈련시키고, 심지어 뇌 기능에 필요한 화학물질까지 만들어 냅니다. 마치 우리 몸속에 또 하나의 장기가 있는 셈이죠.
과학자들은 이 미생물 생태계를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마이크로바이옴의 균형이 곧 장 건강의 핵심이라는 것이 현대 의학의 결론입니다.

건강한 장의 조건
그렇다면 '건강한 장'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요? 흥미로운 점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정상 마이크로바이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마다 식습관, 생활환경, 유전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장내 미생물 구성도 제각각입니다.
다만 건강한 장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유익균과 유해균 사이의 균형이 잘 유지됩니다. 둘째, 장 점막이 튼튼해서 필요한 영양소는 흡수하고 해로운 물질은 차단합니다. 셋째, 장과 면역 시스템이 원활하게 소통합니다.
- 유익균과 유해균의 좋은 균형
- 장 점막이 튼튼한 상태
- 장&면역 시스템 원활히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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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우리 몸은 다양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만약, 장 건강이 무너지면? (장누수증후군의 실체)
이렇게 똑똑한 우리의 ‘장’
장은 외부 환경과 우리 몸 내부를 구분하는 가장 큰 경계면입니다. 장 점막을 펼치면 테니스 코트 한 면에 해당하는 넓이가 됩니다. 이 거대한 표면은 단 한 겹의 상피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세포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장 장벽'을 형성합니다.
장 장벽의 역할은 영리합니다. 영양소와 수분처럼 몸에 필요한 것은 통과시키고, 세균, 독소, 소화되지 않은 음식 입자처럼 해로울 수 있는 것은 차단합니다. 이것을 '선택적 투과성'이라고 하죠.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 = ‘장누수’
그런데 이 정교한 장벽이 손상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포 사이의 연결이 느슨해지면서, 원래라면 통과하지 못했을 물질들이 혈류로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장누수(Leaky Gut)'입니다.
장누수가 발생하면 장내 세균의 대사산물이나 내독소가 혈액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면역 시스템은 이 물질들을 '침입자'로 인식하고 염증 반응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이 염증이 장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장누수로 시작되는 증상들
임상에서 장누수와 관련하여 자주 접하는 증상들이 있습니다. 복부 팽만감, 소화불량, 변비나 설사 같은 소화기 증상은 물론이고, 만성피로, 두통, 피부 트러블, 관절통, 집중력 저하 같은 전신 증상도 포함됩니다.
물론 이런 증상들이 모두 장누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이 없는데도 이런 증상들이 반복된다면, 장 건강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뇌 축’ 바로알기 (장과 마음, 뇌의 네트워크)
양방향 고속도로
'긴장하면 배가 아프다', '스트레스받으면 속이 뒤집어진다'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연결을 '장-뇌 축(Gut-Brain Axis)'이라고 부릅니다. 장과 뇌는 미주신경이라는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호르몬과 면역 신호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대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통이 '양방향'이라는 점입니다. 뇌가 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장도 뇌에 신호를 보냅니다.

장내 미생물과 정신 건강
최근 연구들은 장내 미생물이 우리의 감정과 기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내 세균은 세로토닌, 도파민, 가바(GABA)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전구체를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우리 몸 세로토닌의 약 90%가 장에서 만들어지죠.
불안장애나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장내 미생물 구성의 변화가 관찰된다는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장내 미생물의 변화가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아직 연구 중이지만, 장과 정신 건강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진료실에서도 이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우울감이나 불안, 불면으로 오신 분들 중 상당수가 장 기능 검사에서 이상 소견을 보입니다. 장 건강을 회복하면서 정신적인 증상도 함께 호전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장 건강을 무너뜨리는 요인들
식습관의 영향
현대인의 식단은 장 건강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정제 탄수화물, 가공식품, 고지방 음식은 유해균의 성장을 촉진하고 유익균을 줄입니다. 반면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 과일, 통곡물은 유익균의 먹이가 되어 건강한 장내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줍니다.
특정 음식에 대한 지연성 과민반응도 장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알레르기 반응과 달리, 지연성 과민반응은 음식 섭취 후 수 시간에서 며칠 뒤에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음식을 반복해서 섭취하면 장 점막에 만성적인 자극이 가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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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와 생활습관
만성 스트레스는 장 건강의 숨은 적입니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면 장 점막의 방어 기능이 약해지고, 장내 미생물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또한 스트레스는 장 운동을 변화시켜 변비나 설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수면 부족, 운동 부족, 불규칙한 생활 리듬도 장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장내 미생물도 일주기 리듬을 가지고 있어서, 생활 패턴이 불규칙하면 미생물 생태계도 흔들립니다.
약물과 환경 요인
항생제는 감염 치료에 필수적이지만, 장내 미생물에게는 '무차별 폭격'과 같습니다. 유해균뿐 아니라 유익균까지 함께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의 장기 복용도 장 점막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환경 독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금속, 농약, 각종 화학물질은 장내 미생물 구성을 변화시키고 장 장벽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장 건강 검사, 어떻게 해야 할까?
일반 검사의 한계
건강검진에서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를 받았는데도 소화 불편, 피로, 피부 문제가 계속된다면, 그건 일반 검사가 '보지 못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혈액검사나 내시경은 명확한 질병이나 구조적 이상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장내 미생물의 균형, 장 점막의 기능적 상태, 음식에 대한 면역 반응 같은 것들은 이런 검사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기능의학 검사가 보는 것
기능의학에서는 장 건강을 다각도로 평가합니다. 아래 몇 가지 주요 검사를 소개해드립니다.
장내 미생물 검사는 대변을 분석하여 유익균과 유해균의 분포, 미생물 다양성을 확인합니다. 이를 통해 어떤 균이 부족하고 어떤 균이 과다한지, 어떤 프로바이오틱스가 적합한지 알 수 있습니다.
소변 유기산 검사는 장내 세균이 만들어내는 대사산물을 측정합니다. 특정 유기산이 높게 나오면 유해균 과다 증식이나 소장세균과잉증식(SIBO)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지연성 푸드 알러지 검사는 특정 음식에 대한 IgG 항체 반응을 측정합니다. 일반 알레르기 검사로는 찾지 못하는 지연성 과민반응을 확인할 수 있어, 식단 조절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자율신경계검사(HRV)는 심박변이도를 측정하여 자율신경계의 균형 상태를 평가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장과 뇌는 미주신경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율신경계가 불균형하면 장 운동과 소화 기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 건강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검사입니다.

문제가 생긴 장, 개선과 치료는?
원인에 따른 맞춤 접근
장 건강 회복의 첫걸음은 '왜 장이 무너졌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같은 소화불량이라도 원인이 장내 세균 불균형인지, 음식 과민반응인지, 스트레스로 인한 장 운동 이상인지에 따라 접근이 달라져야 합니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개인별 원인을 분석한 뒤, 그에 맞는 ‘맞춤형 치료’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기능의학적 접근의 핵심입니다.
장내 미생물 균형 회복
유해균이 과다하다면 먼저 이를 줄이는 과정도 필요하겠죠. 그 다음 유익균을 보충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아무 프로바이오틱스나'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균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어떤 분은 락토바실러스 계열이, 어떤 분은 비피도박테리움 계열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프리바이오틱스, 즉 유익균의 먹이가 되는 식이섬유도 함께 섭취하면 효과가 높아집니다.
장 점막 회복과 식이 조절
장누수가 의심되는 경우, 손상된 장 점막을 회복시키는 영양 요법을 병행합니다. 글루타민은 장 상피세포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점막 회복에 도움을 줍니다. 아연, 비타민 A, 비타민 D도 장 점막 건강에 중요한 영양소입니다.
지연성 과민반응이 확인된 음식은 일정 기간 제한합니다. 보통 4~8주간 해당 음식을 피한 뒤 장이 회복되면 조심스럽게 재도입을 시도합니다.
생활습관 교정
아무리 좋은 치료를 받아도 생활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장 건강은 다시 무너집니다. 스트레스 관리, 충분한 수면, 규칙적인 운동은 장 건강 유지의 기본입니다. 자율신경계 균형이 회복되면 장 기능도 함께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 건강, 근본 치료의 출발점
오늘 살펴 본 내용처럼 장은 단순한 소화기관이 아닙니다. 39조 개의 미생물과 함께 면역, 대사, 호르몬, 심지어 뇌 기능까지 조율하는 어쩌면 몸의 핵심 기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장 건강이 무너지면 그 영향은 소화 증상에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퍼져나갑니다.
기능의학은 이러한 장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증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 기능의 근본적인 상태를 평가하고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무너진 균형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장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줍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로, 반복되는 소화 문제, 나아지지 않는 피부 트러블, 이유 모를 우울감으로 고민하고 계신다면, 장 건강을 점검해보시길 권합니다. 여러분이 겪는 증상의 해답이 바로 그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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